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령 동인도 (문단 편집) == 의외의 순기능? == 전쟁 후반에 패색이 짙어지자 온갖 수탈을 일삼는 등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일본 제국이었지만, 짧은 점령기 동안 현대 인도네시아의 형성에 기여한 바가 없지는 않다. 일본 점령기 동안 칙령으로 적국의 언어인 [[네덜란드어]]와 [[영어]]가 사용금지되고, [[인도네시아어]]가 사실상 유일한 공용어로서의 지위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일본어]]도 공용어였지만 현실적으로 그다지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이 칙령으로 인해 인도네시아어는 뜻밖에 급속도로 발전, 보급될 기회를 얻었다. 유럽어, 일본어 자료를 인도네시아어로 번역하는 위원회가 일본의 지원으로 발족되어, 다량의 기술 문헌 등도 인도네시아어로 작성되었다. 또한 인도네시아를 회유시키기 위해 1944년 9월 7일 [[고이소 구니아키]] 총리는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언젠간 독립국가로 만들어주겠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물론 당시에는 인도네시아인들을 회유하고 형식상으로만 독립시켜 괴뢰국으로서 지배하기 위한 의도가 다분했겠지만, 1945년 8월 패색이 짙어진 일본 제국 정부가 적국 네덜란드에게 빼앗기느니 독립을 진짜로 시켜버리면서 결과적으로는 거짓말이 아니게 되었다.] 실제로 1945년 3월 1일에는 일본 점령당국에 의해 독립준비조사회라는 단체가 설립되었다. 1945년 8월 7일에는 21명의 인도네시아인들을 위원으로하는 독립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일본이 조금만 늦게 항복했어도 아마 인도네시아에 일제의 괴뢰국이 설립되었을 듯하다. 이러한 인도네시아어의 발전은 독립 후 [[인도네시아|인도네시아 공화국]]이 인도네시아어를 공식어로 사용하는 데 밑거름이 되며[* 프라무댜 아난타 투르, 안드레 블첵, 《작가의 망명》 1장 참조.], 더 나아가 인도네시아와 일본의 관계 개선에도 한 몫 하게 되었다. 실제로 인도네시아의 일본 점령 시기는 한국의 [[일제강점기]]와 비교하면 3년으로 비교적 짧기도 하고, 이전의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이나 이후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재침략 때문에 반네덜란드 감정이 너무 심해 상대적으로 일본에 대한 악감정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일부 [[일본군 패잔병]]은 전후 인도네시아군에 입대하여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당시 네덜란드군을 상대로 싸우기도 했다. 실제로 일부 일본군들은 점령지에서 안나가고 현지에서 중국계로 신분 세탁해 사는 경우도 소수 있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